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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아재의 프라이빗_노트/대치동아재 이야기

기적이나 신화는 존재한다?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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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기사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요즘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보수적이라느니... 등의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내용을 공유합니다.


모텔 청소부·공사판 일용직···회장님들의 반전아르바이트 이력서

CCBB - 2020.11.16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부의 세습이다. 재벌의 재산이 더 불어나 재벌 2세에게, 다시 3세에게 최근엔 4세에게 간다. 없는 사람들이 부를 쌓아 위로 올라갈 길이 없어졌다고 한다. 상류사회로 올라갈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빈손으로 시작해 당대에 큰 부를 이룬다. 지금도 막노동, 알바 같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결국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있다. 당대에 큰 부를 쌓은 자수성가의 표본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모아봤다.

 

모텔 알바 경험 살려 사업 구상

스물셋에 할만한 아르바이트는 세 가지였다. 원양어선, 도자기 공장, 모텔 일. 모두 숙식을 해결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텔 청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야놀자 창업자 이수진(42) 총괄대표는 젊은 시절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야놀자는 국내 1위 여가 플랫폼이다. 휴대폰 앱으로 모텔을 예약·결제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2015년 이후 연평균 80% 이상 성장해왔다. 2018년 1,8851,885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수진 대표는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다. 충남 충주 출신으로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작농으로 일하던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후 이 대표는 조명·금형 제품 설계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업가를 꿈꿨다. 당시연봉은 2,000만원이었다.

 

다음엔 공짜로 숙식할 수 있다는 말에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46개월 동안 청소·주차·프런트·객실관리 등 숙박업소 일을 배웠다. 월 200만~300200만~300만 원을 벌었지만 모텔업 특성상 24시간 근무했다. 그때 떠오른 사업 아이디어가 지금의 야놀자다. 야놀자 송민규 실장은 이수진 대표님은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금의 레저 플랫폼을 구상했다”라고” 설명했다.

 

20053월 포털 사이트 다음에 모텔의 가격·약도·비품·주차장 정보를 담은 야놀자카페를 만들었다. 이후 모티즈라는 모텔 사이트를 운영했다. 전국 각지의 모텔 정보와 할인 소식을 올렸다. 모텔 리뷰·광고 서비스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2011년 스마트폰을 이용해 위치 기반으로 모텔 정보를 볼 수 있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했다.

 

셀트리온 서정진 대표는 중학생 때 연탄배달

 

수저 타령 그만해라. 부모 직업이나 집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성공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서정진(62) 셀트리온 그룹 회장은 2017년 세계지식포럼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서정진 회장은 올해 포브스가 발표한 ‘2019 포브스 억만장자순위에서 부자 순위 181위를 기록했다. 그의 재산은 81억달러(81억 달러(한화 약 9조1000억원)9조 1000억 원)로 집계됐다.

 

세계적인 부자로 거듭난 서정진 회장이 젊은이들에게 출신 타령그만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 은평구 기자촌(진관외동)에서 연탄가게를 했다. 중학생이었던 서 회장도 아버지를 도와 연탄배달을 했다. 학비가 없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추 장사를 하기도 했다. 학비를 직접 버느라 남들보다 1년 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76년 건국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서 회장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도 과외가 불법이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아르바이트는 택시 기사였다. 돈을 더 벌기 위해 24시간 택시를 몰았다. 택시를 몰고 다닌 다음날엔 하루 종일 공부에 매달렸다. 4.3점 만점에 평균 4.18점으로 조기 졸업했다.

 

1983년 삼성전기에 입사했다. 1992년 서른넷에 대우자동차 최연소 임원으로 올라섰다.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이 해체당하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200045살 나이에 아내가 준 50005000만 원으로 넥솔·넥솔바이오텍을 창업했다. 제약산업 규모가 10001000조 원 이상이라는 점에서 유망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바이오산업의 메카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관계자를 만났다. 사업 아이템을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없어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싸구려 모텔에서 지냈다. 밤엔 레스토랑에서 접시 닦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2002년 넥솔을 셀트리온으로 다시 창업했다. 2003년 투자금을 모아 인천 송도에 에이즈 백신 생산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공장 완공 1년 전이었다. 이전받은 에이즈 백신 기술의 임상 3상(세 번째3상( 임상시험)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돈을 빌렸다. 공장을 완공한 다음 일이 풀렸다. 20053월 글로벌 제약업체 BMS와 위탁생산(CMO) 계약을 맺었다. 셀트리온 공장은 아시아 최초로 FDAFDA설비 승인을 받았다. 2007년 셀트리온은 635635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2019년 5월155월 15일 시가총액 2626조 원으로 코스피 시장 5위를 기록했다.

 

그땐 과외가 금지였지만 전 몰래바이트(몰래 하는 과외 아르바이트)’ 많이 했습니다. 첫 월급 1515만 원을 받아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 먹었습니다.”

 

카카오 김범수(53) 의장은 봉천동(현재 광진구 화양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빈민촌 중 하나다. 김 의장의 할머니까지 여덟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재수 후 1986년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관 식당 밥은 500원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 먹을 돈이 없었다. 과외를 금지하던 시절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1992년 석사 졸업 후 삼성 SDS에SDS 입사했다. 1998년 한게임을 창업했다. 2000년.2000 한게임과 네이버컴을 합병해 NHN을 설립했다. 2004년.2004년 NHN 단독 대표를 맡았다. 이후 20103월 카카오톡을 출시했다.

 

넷마블 방준혁(50) 의장의 재산은 약 2조4,000억원(2019 3월 포브스 자료). 방 의장은 고교를 중퇴한 중졸이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공장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방탄소년단(BTS)의 아버지빅히트엔터테인먼트 방시혁 대표가 방준혁 대표의 동생이다. 방준혁 의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1998년 넷플릭스 초기 사업 모델과 유사한 영화 비디오(VOD) 대여 서비스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 한 편 당 500원이라는 가격으로 인터넷에서 영화를 보여줬다. 그러나 당시 영화 한 편을 다 보기엔 인터넷 속도가 느렸다. 또 투자금이 많이 들어 결국 실패했다. 이후 2000년 자본금 11억 원을 모아 넷마블을 창업했다. 테트리스·웹보드게임으로 1년 만에 1,0001,0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넷마블에 킹오파지적재산권(IP)을 제공한 SNK 전세환(38) 대표는 나 또한 고등학교 졸업 후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해봤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 학벌이나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전 대표는 “자신이“ 조직에서 얼마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지가 성공을 판가름하는 열쇠라고 밝혔다. SNK는 시가총액 약 77007700억 원에 달하는 게임회사로 올해 5월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CCBB 강자깡


이런 이야기들은 국가나 사회 시스템을 지탱해주는 동력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전설, 또는 신화 정도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신화... 정도로 간주되는 것이 맞다고 여겨집니다.

 

아래 이야기는 어떤지요? 소소한 신화 축에라도 낄까요?

 

1. 제가 강사 시절,, 영어 모의고사 3~4등급 정도를 받던 고3 학생을 맡아 지도한 지 2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 학생은 1등급을 받게 되었고, 이후로도 쭉 1등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제가 강사 시절,, 고2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반 12등이었던 학생이 고3 때부터3 성적이 수직 상승하여 서울대 입학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3. 제가 아는 한 학생은 평범하게(?) 지내다 중2 겨울방학부터 영재고 준비를 시작하여 다음 해 서울 영재고 합격하였습니다.

 

먼저 1번 학생의 경우, 제가 맡을 당시 재학 중인 학교 내신 1등급 극초반의 학생이었습니다. 즉 기본 이상의 머리를 갖고 있으며, 성실하고 자기주도 학습능력이 갖추어진 학생이었습니다. 게다가 내신영어의 경우 거의 100점을 받아내던 학생이었습니다.

 

단지 듣기에서 1~2문제를 틀리곤 하며, 영어문제가 요구하는 답과 자신이 생각하던 답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당시에는 90점도 3등급이 가능한 시절이었으니 이해되실 겁니다.

 

이 학생은 먼저 듣기 훈련 집중적으로 시키고, 오답에 대한 허심탄회한 논의가 몇 차례 이루어지고 난 후 100점이나 한 문제 정도 틀리는 것으로 변화됩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감추고, 단지 제가 맡아 3~4등급이던 학생을 2개월 내 1등급을 만들어 낸 이야기만 전달되면 제가 대단한 족집게 강사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2번 학생의 경우, 그 학생이 2학년 말경 그 학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학생을 불러 유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학생이 서울대 진학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어서 아쉽다고...

그리고 그 학생의 누나는 당시 서울대생이었습니다. 머리가 있는 집안이었고, 그 후 학생의 집요한 노력과 누나의 극진한 서포트가 있었습니다.

 

3번 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학생의 연년생 형이 어려서부터 영재고 준비를 하였고, 그 형은 한과영에 합격하였으며, 그 학생은 자신의 형보다 학습능력에서 더 우수하였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상담과정에서 들었습니다.

 

내내 동안 형이 가졌던 자료와 과정을 공유하였고, 본격적으로 입시에 뛰어들었던 시점부터 이미 웬만한 영재고 합격권에 속했던 학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재고 공부 66개월 만에 서울 영재고에 합격한 사실만 가지고 부러워했습니다.

이제 다시 제가 인용한 기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생략된 부분들, 그 배경들이 조금은 눈에 들어오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