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고 입시를 포기하면 10년이 해피하다'
이렇게 외치시는 분(서울 소재 외고입학 / 고2때 일반고 전학 / 현재 아이 엄마)의 글을 최근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특목고라는 것이 존재하였나... 싶은 정도입니다. 제 자신의 경우 과고진학을 잠시 고민하였으나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 생각을 접었고 '열심히 공부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굳건하였습니다.
제가 자란 인구 30만 명 정도의 소도시에서, 소위 ‘뺑뺑이’ 돌려 배정받은 고등학교에서도 매년 10~15명 정도는 서울대에 진학을 하였으니까요... 특목고에 대한 고민을 하는 주변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고, 제 자신이 영재학교, 과고 진학을 목적으로 교수를 하는 학원을 운영하다보니, 마인드도 그 노선으로 편향되지 않았나...하는 반성을 가끔 하는 편입니다.
사실 특목고 진학이 명문대 진학 확률을 높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건 어떤 자료를 어떻게 가공을 하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글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 자신의 경우, 큰 아이에게 학원을 강요한 적이 없었고, 둘째 아이는 영재고 진학을 위해 3년 동안 노력하였으나 결국 포기하게 되는 상황을 맞으면서도 크게 마음 아프지 않았습니다.
저는 상담을 하시는 모든 분에게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담을 진행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제가 경험한 것 중 상담하시는 분에게 도움될 만한 것들을 제공하고, 상담 내용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분석과 조언을 드리지만, 그리고 결국 선택은 상담하시는 학생과 학부모님의 몫으로 남깁니다. 절대 겁박하거나 강한 유인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소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제 둘째가 영재고 입시에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입시에 대해 제대로 몰라서도 아닙니다. 성공한 경우와 실패한 경우, 진학 후 성공한 경우와 진학 후 실패한 경우 등등을 너무 많이 아는 탓인 이유가 더 클 것입니다.
오늘 포스팅하는 글이 특목고(넓은 의미 : 영재학교+과고+전국단위자사고+외고+국제고+광역단위자사고)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학부모님 일부의 사기를 꺽을 수 있다는 조그마한 걱정은 한켠에 접어두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균형된 시각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아래 글은 조금의 각색을 거쳤다는 것을 미리 밝힙니다. 그리고 이 글에도 많은 편견이 존재함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아 래 -
당신의 아이가 정말 공부를 즐기고 잘하는 아이라면 사교육 도움이나 영재원 출신여부, 경시대회 성적 없이도 특목고에 합격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평범한데 엄마의 욕심으로 억지로 특목고에 밀어 넣으면 그 과정도 험난할 뿐만 아니라 특목고에 들어가서도 힘든 인생을 견뎌야 합니다.
특목고, 자사고의 입학요강을 보면 내신성적과 자기소개서만으로 학생들을 선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입시시험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신이라고 해봤자 전 과목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자사고의 경우 5과목 정도를 보고, 과고의 경우 적게는 2과목만 보는 곳도 있습니다.
아이가 정말 특목고에 진학할 정도로 우수한 아이가 맞다면 이 3-5개 정도의 과목의 내신을 잘 받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곡소리를 내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기소개서.
자기가 정말 스스로 공부 계획을 세워서 알아서 공부해본 경험이 있는 아이라면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소개서에서 요구하는 내용은 자기주도로 학습을 해본 경험, 꿈과 끼를 위해 노력했던 경험 정도이며, 경시대회 점수나 수상내역 등 객관적 데이터를 적을 경우 자소서를 0점 처리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소위 스펙 딴다고 초등 저학년부터 달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경시대회니 뭐니 하는 것도 다 한때의 유행이었을 뿐, 최신의 업데이트된 입시요강에는 점수자랑, 스펙자랑, 부모자랑을 절대 금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엄마가 만들어주려고 하니 곡소리가 나오는 게 당연하죠. 소설을 써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 소설을 기반으로 면접까지 봐야 하니까요. 자소서는 어찌어찌해서 잘 써갔다 하더라도 면접에서 진실성이 다 판명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억지로 만들어진 아이는 특목고 입시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사교육 별로 안 받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이가 특목고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들이 들리는데요. 그 아이들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제대로 된 아이들이 합격한 케이스라고 보여집니다.
특목고에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3년간의 고교생활을 견뎌야 하는 미션이 남아있습니다.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놓은 그 환경이 얼마나 숨 막히고 답답한지 안 겪어 본 사람은 절대 공감할 수 없습니다.
특목고 생활을 버티고 견디려면 필수적으로 성격이 받쳐줘야 합니다.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낮은 내신등급에도 연연해하지 않는 호연지기가 필요한 아이들. 서울대를 포기한 아이들. 특목고 졸업장이 따고 싶은 아이들이 버틸 수 있습니다.
서울대를 꼭 가고 싶어한다거나, 중하위권에 머무는 상태 자체를 못 견디는 성격, 전교등수권에서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공부하는 환경을 즐기는 타입의 성격들은 특목고에 머물기 어렵습니다.
요즘에야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행을 많이 땡기고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서 특목고에 진학하지만, 간혹 그렇지 못한 경우. 앞서 말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이가 특목고에 합격했다는 그 사례들에 등장한 아이들의 경우, 고교 선행, 특히 영어 수학 심화가 안된 채 특목고에 진학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정말 낭패를 봅니다.
선행과 심화가 안된 채 중학교 교과과정에서만 우수한 학업성취도를 보였던 평범한 우등생은 특목고라는 정글에서 ‘전교 꼴지’라는 어이없는 성적표를 받아보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부의 신 ‘강성태’씨 역시 일산 백석고등학교 진학 후 전교에서 꼴지 언저리의 쇼킹한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산 백석고등학교는 비평준화 시절 최우등생들만 진학하던 고등학교로, 특목고와 성격이 비슷한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의 학교생활기록부입니다[사진 생략]. 1학년은 **외고 영어과 재학시절 받은 담임평가란으로,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3학년을 보면 외국어에 탁월한 소질이 있다고 적혀 있는데요. 과연 이 탁월한 소질이 외고에서 얼마나 먹혔을까요
다른 처참한 과목의 성적표는 비공개할게요. 외국어만 놓고 봤을 때 다른 아이들이 선행을 많이 한 공통영어는 형편없는 성적과 등수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다른 아이들과 동일선상에서 다 같이 처음으로 수업을 받은 영어회화, 영어 문법, 프랑스어, 프랑스어 회화, 에스파냐어 등은 그런대로 중간 이상의 성적을 받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많이 틀려봤자 하나 정도 틀렸던 것 같은데, 다 맞은 아이들이 앞에 수두룩했다는 뜻이 되겠네요.
그리고 그 위에 음악이 적혀있는데요. 어이없게도 특목고 아이들은 음악 역시 엄청난 실력자들이 많아서 초딩때 피아노 깨나 쳤던 아이들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음악 실기 시간의 충격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요. 자율악기 실기 시간에 클라리넷,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 등 실물로 직접 본적도 없는 악기들을 들고 와서 듣도 보도 못한 곡들을 연주해대던 아이들이 기억납니다. 말 그대로 문화충격 그 자체였지요.
음악 성적하면 또 생각나는 성적표가 있습니다. 고 2때 성적표인데요. 일반계 고등학교에 전학 간 후 551명 중에서 음악을 당당히 전교 1등한 모습입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특목고와 일반고의 갭은 단순히 성적뿐만 아니라 예체능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저는 외고 재학시절, 내 아이는 절대로 영어만은 어린 시절에 몰빵 해주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외국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적혀있던 저로서도 외고에서 만난 아이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아이들 중 대다수가 10세 미만에 해외체류 경험이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수년간 꾸준히 영어 사교육을 엄청 해주었던 부모의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하는 아이들 중 중학교 때 교과과정중심으로 영어를 잘했던 아이 < 꾸준한 영어 사교육을 받은 아이 < 해외에서 살다 온 아이
어차피 특목고에는 잘하는 아이들이 몰려 있습니다. 사교육을 받고 해외에서 살았다고 무조건 잘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우수한 아이들 중에서 봤을 때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있더라는 것을 체감했다는 경험담을 공유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제 대학동기 중 대원외고 졸업생 한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원외고 생활을 어떻게 버텼냐는 저의 물음에, '서울대 포기자는 해피하게 3년을 보내'라고 답했습니다. 내신을 다 포기하고 수능 준비만 하면 되었던 시절에는 가능했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는 결국 대입을 위한 중간과정입니다. 많은 학부모들이 착각하는 것이, 특목고에 보내면 좋은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믿는 것인데, 실상은 어차피 갈 아이들이 특목고에 모여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특목고에서 대입을 위해 특별히 무엇인가를 해 준다기 보다, 어차피 우수한 아이들이 특목고라는 과정을 잠시 거치는 것일 뿐인데요. 제 경험으로는 특목고의 커리큘럼이 오히려 입시에 방해가 되면 되었지 결코 도움이 된다고 보진 않습니다.
일반 수업시간에 배우는 내용이 너무 많고, 어렵습니다. 선행을 엄청 돌린 아이들이 겨우 소화할 수 있는 난이도가 일반 수업시간에 인정사정없이 나옵니다. 저는 외고 1학년 때 배웠던 난이도의 영어와 수학을 평생 써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쓸 데 없는 공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줄 세우기 위한 난이도였겠지요.
외고에서 배우는 영어는 토플보다 어렵습니다. 대학 입시만 하면 되는 아이들이 굳이 그렇게 어려운 난이도의 영어를 공부해야 될 필요가 있나요? 실용주의자인 저로서는 효용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서울대에 갈 수 있을만한 아이들이 100명 정도 특목고에 진학한다면 절반 이상은 내신 때문에 탈락하고 3-40명 정도가 겨우 서울대에 가게 되는 수준인 것 같은데요. 제 동기들의 경우를 보면 자퇴를 하거나 일반고에 전학을 가서 결국 서울대에 진학하는 케이스가 많았습니다.
선의의 희생자들이 양산되는 구조인 셈입니다. 제 친구들 중에도 수능대박이 나서 서울대 아무 과나 골라갈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받고도 내신 때문에 서울대에 원서도 못 냈던 아이들이 꽤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특목고가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을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더 낮춰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과거 입시제도 하에서 설명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고 수시의 비중이 70%까지 늘면서, 특목고 무용론이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는데요. 고등학교에 서열을 매기게 되면서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냐가 수시 점수에 반영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복잡해집니다. 어차피 잘할 아이들, 평범한 중학교 우등생, 부모의 서포트로 만들어진 아이들... 이 세 부류의 아이들이 특목고에 모여있는데요.
어차피 잘하는 아이들은 소위 '천재'들로 사교육도 별로 안 받고도 특목고에서 전교 등수에서 노는 기염을 토하는 부류의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특목고에 있어도 됩니다.
평범한 중학교 우등생은 저 같은 타입으로, 선행을 1도 안하고 교과과정만 충실히 따른 경우 초기 1년 연착륙 시기에 내신을 망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자기주도학습이 내재된 타입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 갭을 메우고 따라잡긴 합니다. 다만 서울대는 포기해야 하는 운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느냐, 나가느냐 선택은 본인 몫입니다.
부모의 서포트로 만들어진 아이들은 절대 다수일 뿐만 아니라 하루 이틀의 서포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 엄마의 노력이면 일반고에 가서도 승승장구 할 수 있을 것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특목고 졸업장도 매우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남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어려운 것은 대입도 아니요, 특목고 잔류도 아닙니다. 빠방하게 선행이 돌려진 아이들이기에 특목고 내신을 따라가는 데도 무리가 없습니다. 다만 특목고 입시가 가장 큰 걸림돌일 뿐입니다. 특목고 입시에서 자기주도학습력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특목고 커리큘럼이 대입에 큰 도움이 안 되고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줌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수시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특목고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유리해진 상황입니다. 입시가 이대로 가는 게 맞나 싶습니다.
평범한 중학교 우등생 타입의 아이가 특목고 진학을 희망할 경우 선행을 단단히 하고 들어가야 피해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주지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중학교 때 하던 대로 하면 잘 하겠지란 생각은 절대 먹히지 않습니다. 제로베이스 과목들 몇 개 외에는 전부 ‘넘사벽 실력자’들이 포진해 있는 곳이 특목고입니다.
요즘에는 특목고 입시를 위해 아이의 7세부터 엄마가 달려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엄마가 열심히 달린 경우 가장 어려운 난관은 대입보다 오히려 특목고 입시가 됩니다. 엄마가 열심히 달릴수록 아이의 자기주도학습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목고 입시라는 큰 산을 용케 잘도 넘습니다. 자기주도학습 시나리오까지 만들어주는 세상이니까요.
아이들의 인생에서 대입이 더 중요한지, 고입이 더 중요한지 모르겠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대입 하나만이 큰 산이었는데, 최근에는 대입을 위해 고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또, 고교생활을 버티기 위해서 10년에 걸친 선행 커리큘럼이 돌아야 하고요.
잘하는 아이들도 숨 좀 쉬며 고등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 예전의 입시제도가 그리워집니다.
오늘의 글은 결론이 없네요. 많은 정보를 드렸으니 판단을 각자 상황에 맞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최근 하고 다니는 말은 '특목고 입시를 포기하면 10년이 해피하다'입니다. 그 이후 3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방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아무리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고 교내 상을 다 휩쓸어도 서울대에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럼 나도 아이를 특목고에 보내야 하나'는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하지만 제가 보내고 싶다고 받아주는 곳이 아니니 모든 것은 아이에게 맡겨야겠죠.
특목고 생활에서 피해를 본 경험자로서 아이를 그런 정글에 밀어 넣고 싶은 마음도 사실 크지 않습니다. 7살짜리를 데리고 무슨 엄한 고민인가 싶지만, 아이가 7살일 때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들 하니 마음이 착잡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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